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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자 2026.03.27

구광모·정의선 회장의 '불편할 용기'

대한민국 대기업 이사회에는 해묵은 농담이 존재한다. 안건은 이미 끝났고 이사회는 그 결론을 확인하러 모인다는 것이다. 이 말이 우스개로 들리지 않는 것은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한 풍경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LG그룹이 있다. LG는 최근 그룹 내 모든 상장사의 이사회 의장을 사외이사에게 맡기는 '사외이사 의장 체제'를 전격 선언했다. LG그룹 오너인 구광모 회장은 지주사인 ㈜LG 의장직까지 내려놓으며 경영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오너의 의지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제도로서의 거버넌스 개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재 LG는 격변의 중심에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중국 CATL과 경쟁 중이고 LG화학은 석유화학 업황이 부진한 가운데 포트폴리오 재편을 서두르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수년간 지속됐던 적자의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구 회장이 오히려 의장석을 내려놓으면서 결단의 무게는 배가됐다. 위기일수록 통제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오너경영의 본능과 반대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LG로서는 어렵고 불편한 길을 스스로 택한 셈이다.


사실 이사회의 홀로서기는 LG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앞서 삼성과 SK가 길을 닦았다. 삼성전자는 2020년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하며 사외이사 중심 체제를 도입했다.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에 이어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에 이르기까지 경제관료를 지낸 무게감 있는 사외이사들이 의장석을 지키고 있다. 이재용 회장이 등기이사를 맡지 않은 상황에서 이사회는 삼성전자 시스템 경영의 보루 역할을 해왔다.


SK그룹은 한층 구체적이다. 최태원 회장은 일찌감치 "이사회가 경영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지주사인 SK㈜의 의장직을 내려놓았다.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이 이끄는 SK㈜ 이사회는 투자결정부터 최고경영자(CEO) 평가까지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며 SK만의 거버넌스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다. 삼성과 SK에 이사회 독립은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제 시선은 자연스럽게 현대자동차로 향한다. 4대그룹 중 유일하게 그룹 총수인 정의선 회장이 이사회 의장을 겸하는 현대차는 미묘한 압박을 받고 있다.


현대차의 논리는 명확하다. 모빌리티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시기에 강력한 오너 리더십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차는 정 회장 체제에서 역대급 실적을 갈아치우며 순항하고 있다.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 자율주행 합작법인 모셔널 설립 등 굵직한 의사결정들이 빠르게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 회장의 직접지휘가 있었다.


그러나 LG가 전 계열사 사외이사 의장체제를 선언하며 투명성을 증명해 보이자 현대차의 겸직은 효율성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구시대적 관행으로 비칠 위험에 처했다.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대주주가 스스로를 감시할 이사회 수장까지 맡는 구조가 잠재적인 리스크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사회의 완전한 독립은 선진국 자본시장에서는 이미 상식이다. 애플은 아서 레빈슨이, 테슬라는 로빈 덴홈이, 월트디즈니는 제임스 고먼이 의장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경영진의 보수를 결정하고 전략을 감시하는 심판이다.


블랙록이나 뱅가드 같은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은 이사회의 독립성을 주주의결권 행사의 명시적 기준으로 삼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배구조 불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사회 독립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일본이 도쿄증권거래소 주도로 이사회 개혁을 밀어붙여 증시 재평가를 이끌어낸 선례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참조가 된다.


오너 중심의 대기업에서 이사회 독립을 실현하려면 내부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LG의 결단은 이제 현대차를 비롯한 여타 대기업들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성과로 정당화되는 한국식 오너경영'과 '시스템으로 검증되는 독립경영' 중 어느 쪽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홀로 남은 정 회장의 겸직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아 보인다.


최지원 기자(frog@bloter.net)

첨부파일
📎 구광모·정의선 회장의 '불편할 용기'.pdf